본문 바로가기
엔터테인먼트/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Blu)

by Cicadakorea 2019. 9. 23.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릿속에 새겨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아오이는 기억 속에서, 이를테면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구 달릴 때, 심할 경우는 메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망령처럼 불쑥 모습을 드러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_ 

 

꿈속에서 내 품에 안겨 잠든 사람은 아오이였다. 낮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밤만 되면 무서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 어린애처럼 가슴에 안겨온다. 왜 그러니, 하고 묻자, 무서운 꿈을 꿨어,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하고 말했다. 다들 죽어가, 아는 사람이 갑자기 변했어, 나를 모른대, 쥰세이가 죽었어, 다른 사람이 내게 전해줬어. 그녀는 꿈을 떠올리며 울고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찬 낮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오이는 지금도 그런 무서운 꿈을 꾸고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일까. 그녀를 안는 사람이 부러웠다. 한밤중에 그녀에게 넉넉한 가슴을 빌려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내 가슴에 달라붙는 메미의 촉감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달콤한 몸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지금 여기가 밀라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안아주었다. 쥰세이, 하고 메미는 잠꼬대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_ 

 

“올라가보고 싶어, 저 위로.” 갑자기 메미가 그렇게 말했다. 내 귀 저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았다. “올라가도 될까?” “당연하지. 피렌체의 두오모도 위로 올라갈 수 있잖아.” 나는,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아오이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실수라도 되듯이 기억 속에 밀폐시켜두고 싶었던 오랜 약속. 그때 우리 둘은 먼 옛날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 밀라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는데, 그날 아오이는 드물게도 열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다, 엉뚱한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농담 반으로, 또는 이야기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버린 듯이. _ 

 

다음 날부터,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아오이가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메미도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주먹을 날린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할아버지는 건강을 찾았을까……. 시간만이 더 차갑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편지를 보내고서 이윽고 해방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지 않은가. 집을 나간 메미도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얽혀, 나를 바닥없는 늪 속으로 빠뜨리는 것 같았다. _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뒤쫓는 인생이라고 쓸데없는 인생은 아니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날이 그리워, 라는 애절한 멜로디의 일본 팝송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다. _ 

 

옷을 갈아입고, 해도 뜨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안개 낀 골목길에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 걸음, 한 걸음 확인하듯이 걸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길로 나서자, 안개도 사라지고, 눈앞에 두오모의 둥근 지붕이 나타났다. 이 거리 사람들은 몇 세대 전부터 저 쿠폴라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오모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큰 기대와 불안이 번갈아 밀려와 서로를 밀쳐냈다. 매일 이 거리를 걸어갔지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기대해서는 안 돼, 하고 나를 향해 말해보았다.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십 년 전, 그것도 몽롱한 약속이었으므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쿠폴라 위에서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면서 팔 년이란 시간을 복원할 것이다. 그리고 아오이가 오지 않아도 나는 무너져버린 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재생시키고 당당히 내려올 것이다. _ 

 

The more we try to forget human beings, it is an unforgettable animal.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Blu)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위의 내용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